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바리스트 갈루아 (문단 편집) === 뒤늦은 인정 === [[파일:external/www.math93.com/galois-notes.jpg]] 갈루아가 작성한 자신의 연구 결과. 한 여자(Une Femme)와 같이 수학과 관련 없는 낙서들이 곳곳에 보인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je n'ai pas le temps(시간이 없다)' 같은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죽기 직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총정리 하는 한편, 자신의 논문을 친구인 슈발리에에게 보내어 자기 대신 세상에 발표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갈루아는 본인의 연구 결과가 옳은지 그른지가 아닌, '''얼마나 중요한지'''를 평가받고 싶었다고 한다. 슈발리에도 천재였던 친구의 노력을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슈발리에는 갈루아가 죽기 전에 한 부탁대로 그의 논문을 [[독일]]의 수학자인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 갈루아가 참가한 그랑프리에서 갈루아를 이긴 수상자였다.]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게 보냈지만, 그들은 프랑스인의 빡빡한 논문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우스는 당시 갈루아의 논문을 읽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이 일로 가우스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비판을 받고 있다.''' 물론 당시 가우스는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전국에서 논문이 물 밀듯이 몰려와 자신의 본업조차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우스를 두둔하는 주장도 많다. 가우스의 지인들은 "나에게 하루에도 편지가 수십 통은 오고 책도 한 달에 수십 권 온다네. 그들의 수학적 시도를 나 혼자 다 인정해야 하는가? 나도 처음에는 열심히 읽었으나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공식을 나에게 인정해달라는 이들은 뭔가? 나도 대학교수이자 나의 수학 연구로 시간이 부족하다네."라는 생전의 가우스의 말을 언급했었다. 또한 아벨 건에 대해서는 아벨이 논문의 제목을 5차 이상의 방정식의 근의 공식이 없음을 증명했다는 것이 아닌 5차 이상의 방정식의 근이 없음을 증명했다는 것으로 잘못 지어서 일어났다는 설도 수학사학에서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닐스 헨리크 아벨]]과 갈루아 젊은 비운의 두 천재의 편지들을 무시하다 나중에 그들의 업적을 뒤늦게 알게 된 가우스는 내심 후회하면서 이후 받게 되는 논문들을 조금씩이나마 읽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슈발리에는 포기하지 않고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인 조제프 리우빌[* Joseph Liouville. 1809–1882. 최초로 초월수의 존재를 증명한 수학자. 리우빌의 정리로 유명하다.]에게도 갈루아의 논문을 보냈고, 리우빌은 갈루아의 논문을 주의 깊게 검토해본 결과 그의 발견이 아벨과 비슷한 업적임을 이해하게 된다. 애국자였던 그는 '''조국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의 존재를 알게 되자 굉장히 흥분했지만, 갈루아의 논문은 '''불세출의 천재'''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설명이 부족했기에, 리우빌은 일반 수학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주석을 덧붙인 후 학계에 공개한다. 사후 10년이 지나서야 젊은 천재의 업적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갈루아의 논문을 무시했던 야코비도 그제야 혹시 갈루아의 또 다른 논문이 없냐면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가우스도 10여년이 지나서야 아벨과 갈루아를 무시했던 걸 후회한다.''' 갈루아 사후 갈루아의 천재성이 알려지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시 담당관들은 천재를 알아보지 못한 죄로 징계를 먹게 되었다. 그리고 갈루아의 케이스는 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시제도 개편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다만 면접관들은 억울한 면이 있어서 소송을 걸어 저항했는데 그 때문에 위의 칠판 지우개 투척과 같은 일화가 퍼지게 되었다. 저런 건방진 태도로 일관하는데 어떻게 제대로 평가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혜자가 바로 프랑스가 낳은 또 하나의 천재 [[앙리 푸앵카레|쥘 앙리 푸앵카레]]. 푸앵카레 역시 갈루아처럼 수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에선 낙제점(하지만 이후 천문학이나 다른 분야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한 다재다능한 면을 보였다.)을 받았던 천재였다. 더불어 갈루아처럼 성격이 개차반이었지만 에르미트[* 샤를 에르미트(Charles Hermite, 1822–1901). 수학 분야에서 상당한 천재였음에도 어릴 적부터 다리 하나를 절었다는 이유만으로 퇴학당했다. 다만 이는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항목에서 나오듯이 시작이 사관학교 같은 성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학당한 에르미트는 열심히 공부하여 갈루아랑 비슷한 20살 나이로 논문을 발표해 인정받아 수학적 성과를 이루자 퇴학당한지 몇 년 안가 에콜 폴리테크니크 측은 에르미트를 조교로 받아들였고 그는 나중에 정식 교수가 된다. 에르미트는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있어도 천재적인 수학자에 대하여 관대했기에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시제도 개편에 열심히 나섰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갈루아와 달리 프랑스 최고 명문인 [[소르본 대학]] 교수(다만 천문학)가 될 수 있었다. 갈루아의 논문이 공개된 후, 그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리우빌은 "갈루아 같은 천재들은 자신이 발견한 이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새로운 이론을 내놓을 때는 시시콜콜한 설명을 붙여야 이해가 되는데, 그러지 못했기에 일반 수학자들은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라며 외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갈루아의 논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러한 사례는 지금도 볼 수 있는데, [[밀레니엄 문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한 [[그리고리 페렐만]]의 사례가 있다. '''그리고 현대에 수학을 하는 모든 학생들은 갈루아의 업적을 배우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